[1] 울타리와 쥐
강보원

뭎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나는 뭎의 멤버인 손민선, 조형준과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이 열리고 있는 성수동 우란문화재단 근처의 카페에서 만났다. 청탁 취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은 바로 두 사람은 뭎의 작업들에 대한 아카이빙의 필요성을 느꼈고, 여러 사람에게 뭎에 대한 글을 받는 방식으로 이를 해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뭎 측에서 어련히 생각을 했겠거니 싶으면서도 약간 의아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때까지 뭎의 공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해맑게 웃으며 아카이빙이 꼭 무엇인가를 잘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리뷰를 쓸 때에도 작품을 실제로 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말 하는 내내 손민선 씨는 씩씩하게 웃고 있었고, 조형준 씨는 이상하리만치 맑고 투명한 눈으로 희미한 웃음을 띄고 있었는데, 왠지 둘 모두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우리가 대면하고 있긴 하지만 어떤 엇갈린 차원에 속해 있는 것처럼…… 가령 커피를 마시며 나온 말도 그랬다. 손민선 씨가 갑자기 공연을 하다보면 자신이 죽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했다. 조형준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이라고……? 물론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다. 사실 모든 예술 작품, 모든 재현이 그렇다. 헤겔은 문자가 사물을 살해한다고 말했다. 몸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행위는 몸의 문자되기이기도 하며, 그러니까 몸-문자에 의한 몸-사물의 살해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면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이건 뭐랄까, 조금…… 사변적인…… 표현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전시장에서 영상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것이다. 이 영상은 무대 위에 사람이 포대에 꽁꽁 싸여 있고, 아무 의식이 없는 그 사람을 감싼 포대를 한 여자가 낑낑대며 벗기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어딘가 기묘한 노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작뿐만 아니라 영상 전반적으로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쓰러진 몸을 누군가가 짐짝처럼 끌고 가고, 혹은 쓰러진 몸이 스스로를 짐짝처럼 끌고 가며, 기타 등등이었던 것이다. 아니, 분명히 죽음 느껴졌겠네…… 이러면 세상에서 제일 사변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나는 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같은 반성을 하며 홀린 듯 영상을 보고 바깥으로 나왔다. 쾌청한 가을 햇살과 바람을 맞다보니 카페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며 방금까지 보았던 전시가 모두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 두 층위가 완전히 구분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왜 쓰러진 몸, 쓰러지는 동작, 죽음의 재현에서 으스스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영상 속에서 연기자는 눕고, 바닥에 깔린 연기가 그를 감싸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그렇게 하듯 손을 치켜들고, 다리를 치켜든다. 꿈틀거리기, 뒤척이기, 기어가기, 묶여 있기, 저항하기, 끌려가기 등등, 수동성과 최대한도로 결합한 움직임이 뭎의 움직임이다. 왜 뭎은 이런 몸짓으로 공연을 만든 것일까? 이것은 다시 죽음과 재현의 연관 속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재현이란 원본 대신 나타나는 것, 대신 나타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플갱어 류의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두려움을 함축하고 있다. 나를 재현한 것과 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지? 재현된 것은 나의 안방을 차지하고, 나라고 주장하며,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고 주장한다. 옛날이야기에서 한 도련님은 밤에 손톱을 깎지 말라는 경고를 어기고 손톱을 깎아서 버리는데, 쥐가 그 손톱을 먹고 도련님이 된다. 쥐-도련님은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고, 가족들은 진짜를 판별하기 위해 도련님만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을 물어보지만 쥐-도련님은 막힘없이 대답한다. 그런데 이때 쥐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이 이야기에서 쥐와 도련님을 이어주는 것은 작은 손톱 조각 하나뿐이고,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체, 그것도 신체의 죽은 부분이 그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거나, 혹은 그것이 모종의 주술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이 아무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연결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생생한 공연을 보지 않고 공연의 재현된 버전, 또 몇 개의 정보들만 가지고 뭎에 대한 글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쥐의 관점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쥐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전시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에서 관객은 영상을 곧바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상이 상영되는 공간은 가벽으로 막혀 있고, 그 공간에 입장하기 위해서 관객은 벽 바깥에서 ‘쥐구멍처럼’ 뚫린 구멍을 통해 내부의 스크린을 엿봐야하기 때문이다. 이 구멍은 애매한 높이에 나 있어서 사람들은 몸을 숙이거나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고개를 내밀어 벽에 바짝 붙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본 영상으로부터 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얻게 되고, 그제야 영상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전시 대상은 영상을 둘러싸고 관객으로부터 차단하고 있는 벽-가림막이다. 이 맥락에서 재미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스크린이 하나의 가림막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림막을 걷고 들어가 또 다른 가림막을 만난다.

 

왜 하필 가림막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림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쥐 이야기를 조금 더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가림막이란 대상에 곧바로 다가가지 않는 일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또 쥐라는 동물이 가림막과, 정확히는 가림막이 생산한다고 여겨지는 것 – 경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로버트 단턴은 간명하게 핵심을 짚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다람쥐가 아닌 쥐라고 부름으로써 모욕한다. ‘다람쥐’는 「인형의 집」에서 헬메르가 노라를 부르던 애칭처럼 친밀함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다람쥐도 쥐나 마찬가지로 설치류이고 위험하며 세균이 득실거린다. 다람쥐는 명백하게 옥외에 속하기 때문에 덜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 모든 경계선은 위험하다. 지키지 않고 내버려 두면 무너질 것이고, 우리의 범주도 붕괴할 것이며, 우리의 세계는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다.”[ 1 ] 다람쥐와 달리 쥐는 명백히 외부에도, 내부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쥐를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우리 속담도 같은 것을 암시한다. 밤은 사물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시간이며, 그렇기에 외설적이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을 관람하는 우리는 밤의 울타리 앞에 선 쥐가 된다. 뭎은 어둠 속에 겹겹의 울타리를 설치해놓고, 우리에게 그 울타리 사이를 마음껏 움직여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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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연출: 뭎
영상제작: 이현지 
제작지원: 우란문화재단

사진: 언리얼스튜디오

 

  • [ 1 ]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조한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312쪽.

  • 강보원

    시와 평론 등의 글을 쓴다. 시집 『완벽한 개업 축하 시』,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