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평화를 위해>는 뭎으로부터 전달받은 포트폴리오 영상 가운데 유일하게 원 샷 원 컷으로 촬영된 영상이다. 공연장 상단에 달린 카메라로 무대 전체가 보이게 촬영된 15분짜리 영상의 주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사다리를 들고 무대에 나타나 사다리를 오르려고 한다. 그는 허공에 사다리를 걸치고 절실한 한 걸음을 뗀다. 그러나 허공은 사다리를 붙잡아주지 못하고 사다리는 당연히 고꾸라지고 남자의 몸도 덩달아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이윽고 흰 옷을 입은 작업자들이 나타나 쓰러진 남자의 옆에서 설치물을 공사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쓰러져 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쓰러져 있던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일으켜 세우고, 완성된 구조물 위로 그를 천천히 인도한다. 남자의 사다리는 구조물 가장 끝에 놓인 욕조로 내려가는 통로가 되며, 욕조 속에 몸을 누인 남자는 마침내 안식을 즐긴다(?). 더욱 완전한 안식을 위해 남자에게 헤드셋과 커피가 서빙된다. 그의 헤드셋에서는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라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을 것만 같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몸. 오를 수 없는 사다리. 둘 사이에서 무한히 추락을 반복하는 남자의 몸짓은 더이상 거대 서사나 시대의 가치와 같은 지지체가 사라진 신자유주의의 불안과 위기를 스스로 체화하고 있는 듯하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라는 제목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최후의 안식을 맞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위한 것이다. 확실히 그는 평화로워 보인다. 작업자들이 만든 구조물은 쓰러져 있던 남자의 몸을 일으켜 더이상 쓰러지지 않아도 되는 안락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 남자는 더이상 어딘가로 오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욕조 안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면 될 테니까.
이 기록 영상은 컷을 나누지 않고, 위에서 공연장을 내려다보는 구도의 넓은 샷으로 촬영되었다. 이 말은 러닝타임 내내 쓰러진 남자와 그 옆에서 시공을 하는 작업자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자가 쓰러져 있는 동안 작업자들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설치 작업에 몰두해 있고, 남자 또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일에 골몰해 있다.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자들의 움직임과 ‘쓰러져 있음’을 극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남자의 몸 사이에는 모종의 이질감이 있다. 전자가 설치물을 공사하는 과정을 무대에서 상연하는 퍼포먼스로서 수행하며 안무의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면, 후자는 퍼포머의 몸짓을 통해 특정한 기호를 실어 나르는 익숙한 형식의 안무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떤 벽이나 경계 없이 하나의 무대에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있는 것 같다. 장르가 다른 두 개의 영화를 동시에 틀어놓고 있는 듯한 이질감. 적어도 내게 이 구도는 ‘안무가와 건축가의 협업’이라는 뭎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장면이자, 뭎의 공연에서 늘 감지하는 어떤 종류의 유머에 가장 근접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아니, 웃음이라기보다는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결코 웃을 수 없는 불편함을 지닌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곤혹스러움이랄까. 이런 방식의 곤란함을 ‘뭎’식의 유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난 공연의 흔적을 찾기 위해 “뭎, 영원한 폐허를 위해”라고 검색했더니 뭎의 sns 계정에 게시된 공연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엠유피 의료기 신제품 출시! 엠유피 의료기(Mu:p medical Instruments)는 물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축된 보철기기를 통해 영원한 평화를 위한 멘탈케어-순환 시스템 Mental Care Circulation System(MCCS)을 출시한다. 뭎의 공연에서 일종의 세계관처럼 착안한 고유명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마침 ‘뭎’식의 유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이 문구에 의하면 작업자들이 남자를 위해 지은 설치물은 의료기이자, 하나의 거대한 보철기기이고, 멘탈케어-순환 시스템이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기도(무대에서 실제로 설치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하지만, 고약한 농담이기도 하다. 무대 설치물을 마치 판매 가능한 상품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이 문구는 명백히 패러디이며, 이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농담은 웃어넘기기에는 어딘가 진지한 구석이 있다. 이 적나라한 허구는 무엇을 반전시키고 있는 걸까? 여전히 나는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다고 느낀다. 그 웃음에 저항하고 싶다는 이상한 반동을 느낀다.
다시 무대로 돌아와 보면, 여전히 남자는 쓰러져 있고 작업자들은 설치에 한창이다. 여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을 전개하는 배우도 없고, 냉소적인 농담으로 무대에서 말을 거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없다. 단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장면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뭎은 종종 혹은 자주 본적 없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관객은 기어코 장면 안에서 어떤 희열을 느끼거나, 그 장면 안으로 섣불리 진입하지 못한다. 뭎의 퍼포먼스에는 언제나 관객을 향해 도박을 감수하는 대범함이 깃들어있다). 생소하다는 것은 호기심이 해소되거나 희석되지 않은 채 이질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붙었다 떨어지는 관계들의 총합을 헤아리는 일로 공연의 효과가 확장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쓰러진 남자가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동안 작업자들은 판자를 조립하고, 치수를 재고, 커피 콩을 갈고 있다. 뭎의 작업에서 눈여겨보았던 장면들은 이런 순간들이다. <둘이 된 순간>에서 로비를 점거한 퍼포머들 뒤로 아이들이 생소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미술관을 청소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퍼포먼스와 묘한 싱크로율을 보이는 순간들. 뭎의 작업에서 유머란 단지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가 아니라 우연과 즉흥이 퍼포먼스와 중첩될 수 있는 환경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유머를 생산하는 일보다 유머를 환대하는 일이라고 말해야 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에서 웃음에 통상적으로 ‘무감’이 수반된다고 말한다. 그는 웃음에 있어 감정보다 큰 적은 없으며, 무관심은 희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천연의 장소라고 주장한다.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으로 삶을 대해보라. 많은 드라마가 희극으로 바뀔 것이다. 춤추는 사람들이 일시에 우스꽝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는, 무도회장에서 귀를 막고 음악의 선율을 듣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1 ] 희극성이 완전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무감각 상태와 유사한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곧 희극성이 순수한 지성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2장에서 베르그송은 생명이 있는 것과 기계적인 것 사이의 대비를 언급하며, 그 간극에서 빚어지는 모든 사건이 희극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기계적인 배열이 느껴지는 모든 행동과 사건의 배치는 희극성을 띤다.[ 2 ]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다가 쓰러진 남자. 의욕이 소진되어 보이는 남자. 이때 무대에 누군가가 등장한다면, 남자를 향해 어떤 액션을 취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는 남자를 흔들어 깨울 수도 있고, 그의 사다리가 다시 용도를 되찾을 수 있도록 애쓸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공연의 끝에 가서 작업자들은 남자를 일으키고 남자의 사다리를 건축의 일부로 기능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당장은 남자에게 무신경한 것처럼 보인다. 쓰러진 남자를 무대 한편에 둔 채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설치에 몰두하는 작업자들. 그들은 남자의 안위보다는 설치의 정확한 측량과 시공이 훨씬 중요해 보인다. 그 어떤 극적 전개도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들의 몸짓에서는 분명 ‘기계적인 배열’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사건은 이렇게 재구성될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은 남자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기계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만일 남자의 고통에 공감해 그를 걱정하거나 일으켜 세우려 한다면 남자의 절망은 실제가 된다. 하지만 작업자들이 그 남자를 무감하게 대하며 스스로 기계가 되려 한다면, 남자의 추락을 포함한 이 사건 전체는 얼마든 희극으로 전환될 수 있다. 희극 속에서 절망의 몸짓은 기계적인 것과의 대조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의 장치로 구조화된다. 작업자들이 남자를 쓰러뜨렸던 사다리를 이용해 그를 평화로 이끄는 멘탈-케어 시스템을 완성한 것처럼, 희극은 우리의 거대한 무력감을 희극의 요소로 재편함으로써 고통을 절감해 줄 것이다. 물론 ‘엠유피 치료기’, ‘멘탈-케어 순환 시스템’과 같은 패러디 문구는 더이상 영원, 평화 같은 개념을 낙관적으로 대하기 어려운 시대에 대한 자조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희극에는 분명 세계에 대한 비관과 조소가 있다. 우리는 이 장면 앞에서 마음 놓고 웃음을 터뜨릴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희극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으로 세계의 불가능성을 도구화하고 희극성을 감지하기 위해 부러 과장된 무감함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여기에는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낙관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평화를 위해”라는 공연의 제목은 임마누엘 칸트가 쓴 동명의 책에서 따온 것이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가 단순한 공상이나 희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철학이 목표로 삼아야 할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며 진정한 평화란 일시적인 정전 상태가 아닌, 구조적 조건을 통해 유지되는 법적 상태라 여긴다. 그리고 ‘뭎’식의 유머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구조적으로 건드린다. 뭎의 공연은 유머를 환대하는 장소이고, 그건 유머가 공연 전체를 장악하도록 만들지는 않으면서 유머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대로 사건을 열어둔다는 뜻이다. 이 유머는 한번 발작적으로 터뜨리고 마는 단발적인 웃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불안을 희극의 조건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영원한 평화’에 가까운 착시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웃음이 우리 안의 불안을 속이듯 얼마든 현실을 날조할 수 있다.
후기.
완성된 글을 보낸 뒤 뭎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공연 제목이 ‘영원한 폐허를 위하여’라고 잘못 쓰인 부분이 있는데, 왠지 그것도 좋은 것 같아 그대로 둔다는 내용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 자꾸만 평화를 폐허라고 적는 실수를 해서 여러 차례 고쳤음에도 미처 수정하지 못한 구간이 남아있던 것이다. 그대로 두자는 뭎의 제안은 그 또한 일종의 유머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 반복되는 실수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무의식중에 평화를 비관하면서 폐허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두 단어는 같은 초성을 가지고 있는데, 닮아 있는 동시에 의미적으로는 서로를 등지고 있는 듯한 관계 때문에 더욱 긴밀하게 얽히는 것처럼 보인다. 평화와 폐허라는 단어를 나란히 두면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당시, 철거된 집과 건물의 잔해들이 쌓인 폐허 위로 누군가가 ‘평화’라고 쓰인 깃발을 올려놓았던 사진이 떠오른다. 이 역설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 시대에 평화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평화와 폐허가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뭎의 공연에서 비관과 낙관을 동시에 느꼈던 것도 이런 역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머는 때로 현실을 정확하게 비평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 (2023)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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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구성: 뭎
출연: 강호정, 손민선, 신상미, 임정하, 조형준
보철기기 구조설계: 금손건축
사진: (재)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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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next 23
- [ 1 ]
앙리 베르그송,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 김진성 옮김, 종로서적, 1991, 14쪽.
- [ 2 ]
같은 책,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