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복도
권혜원

뭎이 건네준 포트폴리오의 작업 목록을 보며 가장 먼 과거의 공연 제목과 장소들에서부터 목록을 훑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곳은 목록의 뒤에서 일곱 번째에 자리하고 있는 2017년 ‘⟨모서리 – 경계 현상⟩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였다. 제목은 기억에 없지만, 창동 레지던시에서 뭎의 공연을 처음 보았던 것은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계절은 기억 나지 않는다. 창동 레지던시는 원래 그런 곳이었다. 계절을 알 수 없는 곳. 오래된 관공서 스타일의 시멘트 건물이 자아내는 서늘함이 있는 곳. 특별한 때가 아니고는 거의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없는 곳. 그 날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공연 내내 건물의 복도에 머무르거나 복도를 서성였다. 꽤나 긴, 그러나 아무 특징이 없는 무채색의 복도. 뭎의 공연이 없었다면, 그 복도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며 그 복도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 특징 없는 공간이 오래 머물고 오래 쳐다보는 것만으로 특별한 장소가 된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뭎의 조형준이 그 복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해 있거나 아주 천천히 움직이거나 때로는 발작처럼 갑작스레 움직였다. 어둑어둑한 복도에서 수 십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늘어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시간이었다. 전혀 무대 스럽지 않은 평범한 복도에 이상하리만치 많은 사람들이 머물며 서성이는 것은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미래에 일어날 불길한 일의 목격자들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며 일시적으로 서성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고 퍼포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관람자들의 시간과는 다른 흐름 속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어느 건물의 복도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평행 우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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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봄 나는 한국정책방송원의 영상자료실에서 흑백 뉴스 필름의 영상 자료를 복사하고 있었다. 그 영상은 1962년 문래동에 새로운 근로자 합숙소가 준공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대한 뉴스 397호의 일부였다. 나는 당시 작업실이 있던 문래동에 30년이 넘도록 존재했다가 철거되어 현재는 그 위치도 찾기 힘들어진 한 건물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 건물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고 있었고, 흑백 뉴스 필름은 그 자료 중의 일부였다. 뉴스는 1962년에 준공을 기념하여 새 건물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상과 함께 텅 비어 있는 건물의 곳곳을 촬영하여 소개하는 영상을 편집한 것이었다. 아마도 완성된 건물에 누군가 들어오기 전에 촬영한 빈 공간들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네 개의 이층 침대가 있는 방, 복도, 목욕탕 등등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1962년의 흑백 영상을 보고 있던 2012년의 나는 이 건물이 이미 철거되어 사라졌고, 행정 서류를 통해 일시에 폭파 후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상 자료실에서 반복해서 그 빈 공간들을 보는 동안, 나는 그것이 철거 직전 머물던 사람들이 모두 퇴거한 이후의 텅 빈 공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완공을 기록한 뉴스 필름 속에 그 건물이 사라지는 미래가 이미 담겨 있었다. 마치 경로가 꼬여 버린 시간 여행자가 된 것처럼 전과 후를 알 수 없는 과거 속의 예지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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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나는 열리지 않은 전시의 계획안을 보고 있었다. 2015년 여름은 구로구에 있는 금천예술공장의 입주 작가들이 마지막 전시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해 여름은 메르스라는 전염병의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는 시기였고, 불안과 공포가 번져가던 시기였다. 그 해 여름의 전시는 취소되었고, 1년 뒤인 2016년의 여름에 열리게 되었다. 나는 취소된 전시의 도면을 들고 텅 빈 전시장을 걸어 다녔다. 나는 그 공간에서 취소된 전시에 관한 작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전시장의 공간 디자인과 작품의 배치가 그려진 스케치업 도면을 들고 텅 빈 전시장을 걸을 수록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과거가 겹쳐져서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도면 속 공간은 전시 기획자와 공간 디자이너가 구상한 것이고, 과거에 상상한 미래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실현되지 않은 과거이기도 했고, 이제 실현되지 않은 과거의 상태로 다시 실현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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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나는 능력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에 관해 생각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나침반의 바늘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시계 바늘이 제멋대로 회전하는 것처럼 시간 감각이 오류를 일으킨다. 그럴 때면 잃어버렸던 능력이 잠시 나타나고 고정된 현실의 시간 감각에서 벗어나 아주 잠깐 표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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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J.G. 발라드는 1960년 ‘시간의 목소리' 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점점 퇴화하며 꿈 없는 잠에 빠져들고, 결국 혼수 상태에 이르는 증상을 겪고 있는 어느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뇌의학자 파워스는 점점 무의미해지는 현실의 시간 감각을 폐기하며 그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가 지금까지 해 온 행동은 시간과 싸우려 애쓰는 일 그 자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앤더슨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는 문득 자명종을 버리고 시간에 대한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결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손목 시계를 풀어 시간을 엉망으로 돌린 다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건물을 나서서 자동차로 향하면서, 그는 이러한 단순한 행위가 자신에게 가져다준 자유에 대해 반추했다. 이제 시간이라는 복도에서 돌아가는 길을, 쪽문을 탐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석달이라는 시간은 영원과 동일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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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창동 레지던시를 다시 방문했다. 오픈 스튜디오였는지 다른 행사가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그 복도를 마주하는 순간, ⟨모서리 – 경계 현상⟩ 의 공연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모서리 – 경계 현상⟩ 은 여전히 내 머리 속 어딘가에서 상연되고 있었다. 다시 그 복도에 서는 순간 그날의 퍼포머와 관람객들은 마치 붙박이 유령들처럼 내 머리 속 복도 안에서 계속 공연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동 레지던시의 복도는 더 이상 그 이전의 복도가 될 수 없었다. 나는 그 복도를 말할 수 있는 시제를 알 수 없었다.

 

 

 


모서리 – 경계 현상 (2017)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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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연출: 뭎 
출연: 조형준
드라마터그: 김상숙
음악: 정혜민
그래픽: 이진규
조명: 정세영

의상: 랜스 LIJNS
사진: 김성민, 전소영
영상기록: 김성민

  • 권혜원

    관점과 인식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장치들을 탐구하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사회적, 심리적 맥락을 드러내고 그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상설치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한 뒤 영국 런던대학교와 레딩대학교에서 미디어 아트 전공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개인전 《행성 극장》(송은, 서울, 2023)과 《우연작동》(타이페이현대미술관, 타이페이, 2023)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2017),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2018)에 선정되었고, 2019년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했다. 《SeMA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23), 《아쿠아 천국》(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22), 《광대하고 느리게》(경기도미술관, 안산, 2021),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서울, 2021)을 비롯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시간의 복도 - 권혜원